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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소식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및 당선소감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4.01.06 00:00 조회 : 9755

풍경(風磬)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때가 되면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허공에 헛된 꿈이나 솔솔 풀어놓고

나 하루종일 게을러도 좋을 거야

더벅머리 바람이 살살 옆구리를 간지럽혀도

숫처녀마냥 시침 뚝 떼고 돌아앉는 거야

젊은 스님의 염불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낮에는 부처님 무릎에서 은근슬쩍 코를 골고

저녁 어스름을 틈타 마을로 내려가서는

식은 밥 한 덩이 물 말아 훌러덩 먹고 와야지

오다가 저문 모퉁이 어디쯤

차를 받쳐놓고 시시덕거리는 연인들의 턱 밑에서

가만히 창문도 톡톡 두들겨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들을 향해

마른 풀잎처럼 낄낄 웃어보아도 좋을 거야

가끔은 비를 맞기도 하고, 비가 그치면

우물쭈물 기어 나온 두꺼비 몇 마리 앉혀놓고

귀동냥으로 얻은 부처님 말씀이나 전해볼거야

어느 날은 번개도 치고 바람이 모질게도 불어오겠지

그런 날은 핑계 삼아 한 사나흘 오롯이 앓아누워도 좋을 거야

맥없이 앓다가 별이 뜨면

별들 사이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칠 거야

그런 날이면 밤하늘도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렇게 삶의 변두리를 배회하다가 내 몸에 꽃이 피면

푸른 동꽃[銅花]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르면

나 가까운 고물상으로나 팔려가도 좋을 거야

주인의 눈을 피해

낡은 창고에 처박혀 적당한 놋그릇 하나 골라

정부(情婦) 삼아 늙어가는거지

세월이야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하겠지

늘그막에 팔려간 여염집 처마 끝에 매달려

허튼 소리나 끌끌 풀어놓다가

가물가물 정신을 놓기도 하겠지

그런 연후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내 안에 파문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어느 하루 날을 잡아 바람의 꽁무니에 몸을 묻어도 좋을 거야


*문신
1973년 전남 여천 출생.
1999년 전주대 국문과 졸업.
현재 완주군 소양 마음사랑병원 기획실 근무.


시를 쓴지 10년째. 문씨는 “지난 한 해 서른이 넘어서도 계속 시를
쓸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며 2003년에 신춘문예 배수진을 쳤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그는 전주대 국문과에 입학한 1993년부터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던 문학도. 하지만 해마다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셨고, 그를 지켜보던 주위 지인들의 한숨도 커지고 있었다.
여름 휴가를 포기하고 김제 금산사 부근 암자에서 작심하고
시에만 매달렸던 이유도 그 때문.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당선작은 휴가기간에도 자꾸 전화를 하는
회사에서 모티브가 나왔다. 유유자적. 이런저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처럼 건들건들하며 자연에 도취돼
살고 싶은 마음이다. 대학 4학년때 인연을 맺은 스승, 이병천씨
(소설가)와 만날 때마다 글을 쓸 동기가 부여됐다는 그는
“이제 한 매듭을 풀어 자신감도 생겼고, 글에 대한 믿음도 생긴 것
같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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