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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거룩함
작성일 : 2004.06.14 00:00 조회 : 928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김훈의 <칼의 노래>중

그렇습니다. 호환 마마 보다 무서운 것은 정작 따로 있습니다.
굶주린다는 것. 그 앞에서는 누구나 초라한 실존과 부딪힙니다.
밀물과 썰물이야 지구와 달의 인력이 없다면 사라지겠지만
끼니의 파도는 물리칠 수 없습니다.
요즘 날씬한 몸매가 부의 상징인 이유 중 하나도
그 무서운 끼니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지만 그들도 끼니의 초청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죽음의 초청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며칠 전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
너무도 낯설게 다가섰습니다.
요즘 경기가 나빠서 그런지 구내식당은
갈수록 사람들로 붐빕니다.
동아일보 식구가 아닌 분들도 싸게 식사를 하려고
저희 구내식당을 많이 찾아오십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혼자서 식사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상호의존도가 높은 한국인들은
보통 혼자서 식사를 할 때는 계면쩍어 하면서
무척 빠른 속도로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 분들의 표정에는 "밥 먹는 것도 일이다"란
귀찮은 표정이 역력합니다.

먹는 것도 전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삭막한 풍경속에서
조금 이색적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년의 신사분께서 배식판을 앞에 두고
홀로 열심히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입니다.
식사 전에 기도를 드리는 풍경이 낯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개 공공식당에서
그런 기도는 간단히 마치기 마련인데
그 분은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마친 뒤
맛있는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뒤늦은 점심을 그것도 홀로 먹으면서도
그처럼 경건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니....
허겁지겁 숟갈을 놀리며 그를 곁눈질하던
저는 부끄러움에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습니다.

어제 MBC 9시 뉴스를 보다가
그저 때깔 좋은 먹거리를 찾다가 농약범벅이 된
우리 식탁에 대한 한 농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 무덤 다 자기가 파는 거요.
건강을 위해 운동들을 한다고 하는데
속으로는 독약을 먹으면서
운동을 해서 무슨 소용이요"

쓰레기 단무지로 만두속을 채운 만두국을 먹던,
최고급 스테이크를 먹던 우리는 끼니 앞에선
모두 평등한 존재입니다.
경제가 어려운 요즘 그 끼니걱정을 잊게해주는
밥상의 소중함이 새롭게 다가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겸손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밥상을 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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